거짓말
때때로 갑작스럽게 자각하는 무언가가 있다. 지금까지 아무런 생각도 없었는데 지나가듯 훅 끼쳐오는 그런 것들.
카페에 앉은 지 삼십 분쯤 되었을까. 기분 좋은 커피 향이 계산대 주변을 타고 빙글빙글 돌았다. 화려한 번화가와 거리가 좀 있기 때문인지, 드나드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은 한적한 카페는 적당히 여유로웠고 그럭저럭 조용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쌓아둔 단조로운 이야기를 하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발랄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몇몇 주변 공기에 뒤섞였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면, 제가 아는 얼굴들은 아니었다. 짐작건대 용건이 있는 것도 이쪽이 아니라 저쪽. 제 앞에 앉은 이도 상대가 누군지 모르는 표정이었지만, 꽤 익숙한 듯 금세 아무렇지 않게 대한다는 부분이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었다. 아마 이런 일이 종종 있는 모양이었다. 혹시, 하고 조심스럽게 꺼내는 말 뒤에는 누구누구세요? 하는 확신이 붙었다. 누구누구 맞죠, 사인해달라는 몇 글자도 재빠르게 뒤따랐다. 팬이라든가, 방송 잘 보고 있다든가, 저번에 플레이하셨던 거 되게 재미있게 봤다든가, 다음 방송도 기대하고 있다든가. 고요히 흐르던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달라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꺄르르 웃는 웃음소리가 콕콕 박혔다. 때아닌 북적임이었다. 어쩐지 미묘한 기분에 물끄러미 창밖을 응시하며 입에 댔던 음료를 가만히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잔이 부딪치는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이야기의 방해가 되진 않았으리라. 다만 가까이에서 보고 있는 광경이 유난히 멀게만 느껴져서 애꿎은 잔의 손잡이만 계속 매만졌다. 속이 답답한가, 싶었다.
그리 긴 대화는 아니었음에도 유난히 시간이 느리게만 굴러갔다. 들려오는 배경 음악이 유달리 친숙했다. 아마 카페마다 틀어두는 음악은 종류가 늘 비슷비슷한 게 아닐까. 가사를 생각해보다가 말았다. 예전에는 다 기억했었는데. 계산대 쪽에서 주문받는 아르바이트생의 목소리가 명랑하게 들렸다. 주문을 확인하는 목록을 들으면서 음료 제조법을 생각했다. 카페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지 좀 되었지만, 커피를 내리거나 만들던 기억은 멀쩡했다. 그것도 잠깐이었다. 금방 지겨워졌다. 다른 생각을 하려고 했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다. 신경이 약간 곤두선 기분이었다. 고개 돌린 창밖에서는 여전히 눈이 내렸다. 올해 첫눈은 아니었지만, 간만에 내리는 눈이기는 했다. 거리 위로 희게 날리는 눈발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하얬다. 이미 제 눈에 익은 빛깔이었다. 아스팔트를 덮으려던 흰색이 금세 녹았다. 투명한 창 위로 비치는 그가 짧게 손을 흔드는 모습이 제 안경에 겹쳤다. 어쩌면, 이제 익숙해져야 하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래, 그렇구나. 이해할 수 있었다. 시선을 원래대로 돌리며 도로 잔을 쥐었다. 낯선 목소리가 그친 테이블 근처에서 자세를 고쳐 제 쪽을 마주 보는 친숙한 얼굴만이 평소 같았다.
"유명인이네."
"얼굴을 공개해서 그런가 봐. 요즘 따라 알아보는 사람이 많네."
가벼운 대답이었다. 그리고 사실이기도 했다.
옅게 김이 피어오르는 잔을 들며 툭 던진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약간 머쓱함을 담고 있었다. 조금 전 시청자에게 여유롭게 웃으며 사인을 해주던 모습을 떠올려 보다가 말았다. 그렇게 잘했으면서 내심 어색하긴 한 건가. 찬찬히 마주 보며 입에 댔던 잔을 도로 내렸다. 사실 목소리만 가지고 방송하는 것과 얼굴을 드러내고 하는 것은 나름의 장단점이 있었다. 방금 같은 경우는 굳이 고르라면 단점에 가깝겠지만, 마냥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그만큼 인지도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보고 있다는 거겠지. 방송을 오래 하려면 그편이 더 나았다. 시청자가 있어야 했다. 방송하는 건 제법 좋아한다고 했었으니까. 그렇지만.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뭐. 불쑥 튀어나오려던 생각이 연기처럼 스르르 흩어졌다. 여전히 기분이 이상했다. 괜히 반쯤 빈 잔을 만지작거리며, 일부러 다른 쪽으로 생각을 돌렸다. 그나저나 금방 알아봤네. 제가 내뱉는 말이 별다를 것 없이 평소 같아서 다행이었다. 얼마 전에 염색했다던 머리카락 색이 튀어서 그런 건가, 하고 막연히 떠올렸다. 방송 때와는 다르게 안경도 쓰고, 모자를 쓰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알아볼 사람은 알아볼 테니까. 점점 더. 나중에는 더 많이. 이런 일이 빈번하게 생기겠지. 거기까지 생각하자 미묘했던 기분이 한층 더 짙어졌다. 턱을 괸 채, 무심코 손을 내어서 그가 쓰고 있는 모자를 꾹 아래로 잡아 내렸다. 하지만 그런다고 얼굴이 가려지지도 숨겨지지도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보는 사람이 많이 늘어서 그렇겠지."
도로 의자에 푹 몸을 기댔다. 제 쪽을 보는 그와 시선을 맞춘 채, 좋은 거 아니냐고 덧붙이는 입안이 유독 썼다. 그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긍정적인 일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사실 칭찬이라도 해줄 일이 아니었을까. 네가 열심히 해서 그렇다고 늘 그랬던 것처럼 툭툭 머리라도 매만져줬으면 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눈을 내리뜨고 둥근 잔 위를 손끝으로 몇 번 빙글빙글 매만졌다. 갑자기 테이블 위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고 싶어졌지만 참았다. 아까부터 계속 이유를 고민하고 있었지만 뾰족한 답은 찾을 수 없었다. 다만, 희미한 불쾌감이 머릿속에 남아 계속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수면 위에 파문이 이는 것처럼 조금씩 조금씩 넓어지는 감정을 꺾어 누르며 늘 그렇듯이 무표정한 얼굴을 했다. 제 기분을 상대가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바깥에서 놀 때 계속 사람들이 알아보면 집중하기 힘들지 않아?"
"그렇긴 한데.... 그렇다고 네가 변장을 할 수도 없잖냐. 알아보는 건 어쩔 수 없지. 괜찮아. 잠깐인데."
"그럼 다행이다."
자신이 멋대로 만진 모자를 고쳐 쓰면서 그가 되물었다. 능숙하게 머리를 정리할 때마다 화사한 푸른 빛이 물결쳤다. 가만히 그 모습을 쳐다보다 세유는 한숨처럼 느리게 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굳이 그렇게 상대를 불편하고 번거롭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원인이 자기에게 있다면 더 그랬다. 서로 휴일에 시간을 내서 만나는 사이인데, 이왕이면 편하게 보는 쪽이 그도 좋겠지. 기다림은 익숙했다. 몇 번이든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다. 자신이 뭐라고 그 시간을 빼앗을 자격이 있을까. 주제넘은 말은 삼켜버리는 것이 좋았다.
그래, 다행이었다. 뭐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랬다. 예를 들면 표정 관리에 익숙한 탓에 멀쩡한 제 표정이라든가.
거짓말
주 세유
쥐고 있던 펜이 책상 위를 구르다 적당히 멈췄다. 문제를 확인하며 넘겨보는 노트 위로 줄을 맞추어 적은 숫자와 영어 알파벳들이 인쇄한 것처럼 단정했다. 일단 이것도 끝냈나. 거의 밑바닥을 보이는 커피잔을 비우면서 다이어리에 한 일을 점검했다. 남은 것들이 아직 제법 있었다. 요약글에 과외 준비. 그리고 내일 과 사무실에서 부탁 받은 대로 연락 돌릴 명단도 대충 정리해야 했다. 아까 요약해야 할 논문을 읽어둬서 다행이었다. 시간이 이렇게 없을지는 몰랐는데. 두꺼운 전공 서적을 덮으며 그사이에 과제 노트를 끼워 넣었다. 종일 글자들을 보고 있었기 때문인지, 건조하니 눈이 시렸다. 피곤함에 눈가를 매만지며 잠깐 의자에 기대앉아 있다가, 손을 뻗어 까맣게 점멸하는 노트북을 두어 번 건드렸다. 쓰다만 요약글 위로 짤막한 검은 선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확인할 메일은 더 없고, 정리해야 할 명단은 따로 빼뒀던가. 어차피 해야할 일이라면 빨리하고 쉬는 쪽이 나았다. 안경을 고쳐 쓰고 나서, 머릿속으로 정한 우선순위대로 대강 포스트잇에 메모했다. 분량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니 아마 한두 가지쯤은 12시 전에는 끝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커피를 한 잔 더 가져올까 싶어서 시간을 확인했다. 10시가 좀 안 됐나. 어쩌다 보니 이 시간이었다.
화면 한쪽에 방송 화면을 작게 켜두고 뽑아둔 논문을 체크했다. 아직 시작하지 않아 대기 중인 화면은 지나치게 익숙했다. 언제부터였었지. 생각해보면 이렇게 일주일에 몇 번씩 9시에서 10시에 무언가를 기다린 지는 꽤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전, 정확히는 '그 일'이 있고 난 뒤부터였다. 모두에게 거짓말 같은 기억을 남긴 며칠간. 현실인지 꿈인지조차 제대로 인식하고 싶지 않았던 그 간의 시간. 흑백의 체스판 위에서 다들 장기 말처럼 굴렀던 총성 속의 며칠 속에서 빠져나온 후 자신은 하기로 했었던, 해주기로 했었던 목록을 하나씩 전부 채워나갔다. 모두 살아있다 해도 약속이 사라지거나 바뀌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약속했다면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버텼다.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방송을 보는 것도 그중 하나였었다. 그가 말했던 대로 여간해서는 오르기 힘든 가파른 계단 골목을 찾고, 길게 그림자가 져서 어두운 북쪽 골목을 찾아서 노랑이와 튼튼이를 기다리는 일이라든지, 재미가 있든 없든 방송을 지켜보는 것. 그 정도. 어차피 다들 어떻게 서로를 대해야 하는지 몰랐다. 서툴렀고, 두려웠고, 무서웠다. 누군가는 전학을 갔고, 누군가는 학교를 그만뒀고, 누군가는 남았고, 누군가는 졸업했다. 그렇게 되었다.
방송을 보면 근황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일방적인 소통이었다. 게시되어 있는 글을 읽는 것처럼 '그 시간'을 공유했던 이들을 이따금 만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일까, 어느새 시간을 챙겨 화면 앞에 앉게 되었다. 그랬었던 것 같다. 그 정도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평소에는 마냥 좁은 것만 같았는데 어둠 속에서 헤맬 때는 유난히 넓었었던 교정이나 매일매일 누군가가 잠들어버린 채 꿈꾸는 강당에서 했었던 덧없는 걱정들. 그 연장선 위에 서서, 가끔 주변을 둘러보는 느낌으로 자신은 매번 수많은 시청자 중 한 명이 되었다. 잘 지내냐고, 볼 수 있을까, 하고 무작정 연락을 한 것은 수십 편의 방송을 본 후였다. 사실 두 가지 다 쓸모없는 질문이었다. 굳이 방송을 쭉 보고 있었다고는 말하지 않은 이유는 자신도 잘 몰랐다. 싫어할지도 모르니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그가 그리 나쁘지 않게 지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새삼스럽게 그렇게 물은 이유는. 사소하게 방송 중 흘러나오는 사생활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와 겉보기가 다른 경우도 종종 있으니까, 한 번쯤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뜻밖에 그는 거절하지 않고, 순순히 약속을 잡아주었다.
비어있던 몇 페이지를 빽빽하게 채우고 몇 장 남지 않은 논문을 도로 읽기 시작했다. 길게 긋는 붉은 선에 맞춰서 익숙한 목소리가 스피커 너머로 반짝이며 통통 튀었다. 약간, 라디오를 듣는 기분이랄까. 자신이 처음 보았을 때와 달리, 지금은 방송 진행이든 흐름이든 무엇이든 전체적으로 능숙하고 자연스러웠다. 이제 화면을 보지 않아도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대강 상상해볼 수 있을 만큼.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길래, 무심코 고개를 들어 화면을 보았다. 게임 화면 한쪽에 띄워둔 작은 사각 박스 안에 그가 보였다. 이 시간대의 그는 대부분 즐거워 보였고, 반쯤은 그랬다. 좋아서 시작한 것이라도 일이 되면 가끔은 연기를 해야 하기도 하는 모양이었으니. 그래도 오늘은 기분이 좋은지, 자주 웃었다. 잠깐 펜을 놓고 앞을 가만히 응시했다. 채팅창을 켜두지 않아 어떤 상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시청자들과 무어라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의자에 기댄 채, 반쯤 머리를 옆으로 기울였다.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간간히 눈이 마주치는 착각이 일었다. 또 웃었네.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싫은데, 하고 끝을 늘이는 말끝에 폭신한 웃음이 묻는다. 곱게 휘어지는 눈매. 기분 탓인지 무어라 이어지는 말들이 잘 들리지 않았다. 그저 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짧게 정면을 향해 보내는 손 키스. 애교는 이 정도면 됐지? 하고 이어지는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제멋대로 방송을 껐다. 숨이 턱 걸렸다.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가 말았다. 창을 꺼버린 노트북 화면에는 치다만 워드 파일만이 온전했다. 어째서. 짧은 의문이 들었다. 마치 카페에서 느꼈던 기분과 비슷했다. 갑갑함. 불쾌함. 그 경계에 닿아있는 미묘함. 어딘가로 한 방울씩 떨어지던 물방울이 조금씩 뭉쳐서 흘러넘칠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이유가 뭔지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손을 들어 목 아래에서 가슴께까지를 몇 번 짓눌렀다. 분명 아픈 곳은 없는데도 알게 모르게 호흡이 좀 불편했다. 맥박이 제멋대로였다. 요즘 커피를 많이 마셔서 그런 것인지 속이 좋지 않았다. 다시 펜을 잡았지만 영 집중이 되지 않아서, 억지로 논문을 훑었다. 글씨들이 스치듯 쓸려 지나갔다. 그뿐이었다. 분명 무슨 내용인지 파악해서 조금 전까지 차분히 요약했던 내용도 다시금 적으려고 보니 뒤죽박죽이었다. 두통이 일었다. 처음 정했던 12시가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제대로 끝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차라리 다시 방송을 켤까, 하다가 그만뒀다. 당황스럽게도 계속 볼 자신이 없었다. 특별한 이유도 없었다. 그냥 그런 기분이었다. 손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괜히 텅 빈 주먹을 쥐어보는, 그런 기분. 어차피 잡히는 것은 없는데. 마치 그 날 카페에서 마주했던 아득한 기다림 같았다.
한숨과 함께 머리를 짚었다. 머리가 계속 아팠다. 오늘은 바빠서 제대로 방송을 보지 못했다고 문자를 보내야 할지, 그저 잘 봤다고 짤막하게 감상평을 보내야 할지 계속 머릿속을 맴돌던 고민도 그만뒀다. 휴대폰을 놓았다. 당장 제대로 손에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할 일은 해야 했다. 깨끗하게 비우고 다른 생각을 하자. 다이어리에 적어둔 일정표를 뒤적였다. 체크하지 못한 오늘 일정을 고쳐 쓰려다가 잠깐 손을 멈추고는 넘기고, 넘겨 앞으로 되돌아갔다. 과제 제출일. 쪽지 시험. 레포트 제출. 과대 모임. 학회. 제과 강습. 과외 날짜는 푸른색으로, 중요한 것들은 붉은색으로 적어둔 다이어리 속 작은 달력 위에 분홍색으로 쳐둔 별표가 눈에 들어왔다. '나 투지' 하고 적힌 세 글자가 유독 눈에 박혔다. 별표까지는 일주일 정도 남았나. 가까운지 먼지 알 수 없는 애매한 기간이었다. 언젠가 놀러 갔었던 집이 너무 엉망이라 종종 집을 치워주기로 정했었던 게 한 달로 굳어졌었던가, 그랬다. 자신이 청소기를 들면 거실 위에 널브러져있던 고양이들이 후다닥 도망가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청소기를 매일 돌린다고는 했지만, 구석에 뭉쳐있는 털 뭉치들을 보란 듯이 청소기 끝으로 가리키면 시선을 피하던 얼굴이라거나. 결국, 고양이들과 집주인을 베란다로 내쫓고 대청소를 하게 되지만 그게 썩 나쁘지는 않았다. 색깔을 바꿔 들었다. 슬쩍 그 위에 붉은색으로 한 번 더 덧칠하듯 그린 별이 유난히 눈에 잘 들어왔다.
여유 부리지 말 것. 또 뭘 써야 되더라. 괜히 펜을 손가락 위에서 몇 번 돌리다가 다시 바르게 잡았다. 기분전환이라도 할 겸, 다이어리 뒤쪽에 짧게 적어 내려가는 일기에는 대부분 그 날 있었던 일에 대한 기록이나 반성이나 후회가 적혀있었다. 좀 더 노력해보자라든가, 너무 게으름을 피웠다든가 하는 것들. 때때로 오랜만에 만난 이에 대한 기억이나 추억도 적고는 했다. 쓰지 않으면 잊어버리니까. 적지 않으면 마치 없었던 일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그때'의 일을 그 후에 필사적으로 이어 적었던 것처럼, 일종의 습관이었다. 여전히 머리가 지끈거렸다. 얇은 종이를 넘기며 천천히 자기가 쓴 문장들을 읽다가 최근 들어 일기가 짧아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의식적으로 지워버린 문장들이 빈 공간으로 남아있었다. 무얼 쓰려다가 쓰지 못했더라. 대답은 뜻밖에 간단했다. 제 글씨가 흐트러져 보였다. 피곤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에 대해서 생각하려는 순간 차마 아무것도 쓸 수가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커피를 줄일 것, 하고 억지로 덧붙인 오늘의 일기는 그렇게 두 문장으로 끝이었다. 펜과 맞닿은 새하얀 종이 위로 검은 잉크가 천천히 스며들듯 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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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벚꽃이 눈부셨다. 해가 저문 봄바람은 아직 차가워서 가벼운 차림으로 걷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한낮은 오롯이 봄이었지만, 하늘이 어두워지면 이른 봄이었다. 가볍게 트렌치코트라도 걸치면, 산책하기에는 적당한 계절. 나무 사이로 걸어놓은 조명 불빛 사이를 느리게 걸으며 그 위를 올려다보았다. 바람이 지나칠 때마다 눈처럼 쏟아지는 엷은 분홍빛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저녁 시간이 지난 늦은 밤이었지만 밤하늘 아래로 보이는 광경은 낮보다 밝았다. 저녁을 먹다 갑작스럽게 결정된 꽃놀이는 나쁘지 않았다. 조명 불빛이 반짝여서, 이따금 휴대폰을 들고 사진을 찍는 그가 가끔 불만을 토해내는 것 말고는. 그걸 보고 있으면 어쩐지 웃음이 났다. 그것도 잠깐. 다시금 속이 답답해졌다. 팔랑팔랑. 소리 없이 벚꽃잎이 바닥으로 연이어 떨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때때로 갑작스럽게 자각하는 무언가가 있다. 지금까지 아무런 생각도 없었는데 지나가듯 훅 끼쳐오는 그런 것들. 그게 바로 지금이었다.
그 날 카페에서 왜 네 모자를 아래로 끌어내렸는지. 최근 들어 다이어리에 네 이야기는 하나도 쓰지 못하게 되었는지. 저도 모르게 창을 꺼버린 이후 의식하듯 왜 네 방송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어버렸는지. 네가 친구라고 자신을 소개할 때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인지지. 이상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의식하면 할수록 예전과 점점 비껴나가는 생각이 당혹스러울 만큼 곤란했다. 보통은 누군가를 이렇게 맹목적으로 생각하진 않을 테니까. 무얼 좋아했었는지, 지금은 무얼 좋아하는지. 무얼 싫어했었고, 이제는 무얼 싫어하는지. 취향이라든가, 자기와 닮은 점이라든가, 아니면 다른 점이라든가. 그런 것들을 줄곧 떠올리는 자신이 낯설었다.
ㅡ 내 친구 한 명도 왔네요.
방송국에서 그가 자신을 소개했던 말이었다. 외부 방송이 있다길래 그럼 보러 가겠다고 한 것이 아침. 얼굴을 본 것이 점심. 방청객으로 자리를 지킨 게 오후쯤. 그리고 저녁을 같이 먹으면 지금이었다. 방청석에 앉아 열중하는 그를 보고 있으면, 우연히 눈이 마주쳐서 약속이나 한 것처럼 그는 또 웃었다. 그 순간 알아차렸다. 손끝이 차게 식었다. 자신은 그저 '친구'가 되고 싶어서 제가 그어둔 선 밖으로 나간 것이 아니었다. 동급생이라든지, 같은 학교의 졸업생이라든지, 친한 친구라든지, 단순히 아는 사이가 아니라 좀 더 특별하고 소중한 말들이 필요했다. 남들과 공유할 수 없는 '그 날'을 함께 기억하고 있다는 그러한 특별함은 아니었다. 자신만을 생각한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감정. 마냥 달고 어여쁜 것이 아니어서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지금까지 이어왔던 인연을 끊어버리게 될지도 모르는 날카로운 칼날이었다. 꺾고 꺾어도 어느새 자라나 목 안에서 연신 바스락거렸다. 말할 수 없었다. 아니, 말해야 했다. 아니, 아니. 말해서는 안 되었다.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어떤 표정을 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상처받을까. 싫어할까. 다시는 볼 수 없을까. 그걸 정하는 건 자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걸 정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변화란 늘 불편한 것이었고, 제 감정으로 그를 흔들어놓고 싶지 않았다. 몇 번이든 참으면, 아무렇지 않은 척 굴면 이대로 쭉 그가 정해둔 친구라는 자리에는 서 있을 수 있었다. 모든 게 그대로였을 것이다. 그러려고 했다. 그러려고 했었는데.
"나 투지."
어렸을 때처럼 욕심을 부렸다. 안될 것을 알면서도 그때처럼 손을 뻗어 잡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랬다. 발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한여름의 매미 울음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드넓은 바다. 그 아래로 계속 가라앉고 있었다. 평소처럼 평온한 얼굴이 아닌 너를 보았을 때, 네 머리 위에 가져다 댄 위로가 어느새 되돌아온 순간. 좀 더 기대면 하염없이 빠져버릴 것 같아서 고개를 들었던 그때. 방과 후면 재빠르게 사라져버리는 귀가부의 한 명이라거나, 가끔 먹을 걸 선물해주었던 동급생으로만 남길 수 있었을 때. 가까워지지 않으면 잃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제 주변에 그어둔 선 안으로 넘어오지만 않으면 그에게는 아무런 일도 없을 테니 친구라고 부른 적도 없었다. 소중하게 생각하면 할수록 좋지 않은 일이 생기니까. 놓고 싶지 않다고 여길수록 멀어지니까. 한쪽은 선 안에, 한쪽은 선 밖에서 쭉 마주 볼 뿐인 관계. 앞으로도 변하지 않고 유지할 수 있는 그 정도의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
그걸 망가뜨린 건 자신이었다.
ㅡ 모든 관계가 그렇듯이 가만 있어 주면 다 다가오게 되어있어. 기다려주면. 이름도 불러주면 더 좋고. 다정하게, 원래 친했던 것처럼.
그가 했던 말이었다.
들었던 조언은 썩 쓸모가 없었지만, 완전히 틀리지도 않았다. 약속대로 길고양이들을 몇 번이고 만나러 갔었던 걸 떠올렸다. 물론 노을 아래 어둑어둑해지는 그림자 진 북쪽 골목길에서 마냥 기다리고 있으면 이따금씩 녀석들을 볼 수 있었다. 말했던 대로였다. 적당히 거리를 둔 채 골목길에 앉아서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노랑아. 튼튼아. 그렇지만 아무리 불러도 다가오지 않아서 결국 한쪽 구석에 간식 캔만 놓아두고 온 적이 대부분이었다. 제 목소리가 다정하거나 친한 사이처럼 들리지는 않은 듯했다. 멀찍이 앉아있는 고양이들은 여간해서는 제 말을 들을 기색이 없었다. 요령이 없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럴 때마다 문득 떠올렸다. 너라면 어떻게 이름을 불렀을까. 좀 더 다정하고 친하게 이름을 불러줬을까. 그랬으면 다가왔을까.
ㅡ 널 좋아한다는 마음도 숨기지 말고.
"나 투지. …투지야."
처음 불러보는 이름은 의외로 어색하고 낯설었다.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입안에서 수천 번 굴렸어도 막상 꺼내 든 세 글자는 이상하리만큼 소중했다. 누군가를 이름만으로 부르는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어딘가가 망가질 것만 같았다.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를 자신이 그어둔 선 안으로 넣어 상처받을까 걱정한다면, 사실 가까워지는 방법은 그것 말고도 있었다. 먼저 다가서서 손을 뻗고, 앞서 연락을 하고, 그의 집에 발을 들였던 것처럼 자신이 나가면 그만이었다. 그는 여전히 제 자리에 있었는데 무심코 이끌려서 나가버린 쪽은 자신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렇게 충동적으로 내키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해버린 것은. 네가 다가온 것인지 내가 다가간 것인지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길고양이를 닮은 것은 어쩌면 자신이었을지도 몰랐다.
"한 번만 더 거짓말을 해줘."
벚꽃을 보고 있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때와 달리 이제는 비슷한 눈높이였다. 시선이 맞닿는 것이 더 빨랐다. 이제는 익숙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팔랑팔랑 떨어지는 벚꽃잎이 마치 눈이라도 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온통 하얬다. 여전히 흰색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얼룩이 질까 여간하면 손도 대지 못하고 고르지 못했던 빛깔이 환했다.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았다. 아. 아마도 지금 아무렇지 않은 척 이대로 손을 놓고 평범한 이야기를 하면 태연히 넘길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마치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친구로 남아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은 채로. 앞으로도 쭉 버틴다면 가능한 이야기였다. 잠깐 숨이 막혔다. 입안이 메말랐다. 그렇지만 막상 얼굴을 마주하면 망설임은 짧았다. 역시 이대로는 있을 수 없었다. 웃는 얼굴이 잘 안 되었다. 표정 관리는 제법 자신이 있었는데도 지금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보이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번잡한 소음들 사이에서 그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시야가 온통 익숙한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흰색. 분홍색. 보라색. 몇 번이고 마주한 빛깔들.
"그때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는 좋아한다고 해주면 안될까 하고."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부탁이었다.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한 말을 내뱉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단둘이 있고 싶었다. 다른 누군가에게 웃는 얼굴을 보여주기 싫었다. 서툰 독점욕이었다. 너에게 특별해지고 싶었다. 그런 사이가 되고 싶었다. 네 생각을 하면 무심코 좋아한다고 써버릴까 봐 공백을 채울 수 없었다. 다가가고 싶었다. 이미 소중하고 특별하게 여기고 있었다. 벌써 놓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더는 짓누르고 꺾은 채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어지럽고 숨이 막히고 때때로 네 이름도 부를 수 없을 것 같아서. 평소처럼 얼굴조차 마주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보고 싶은데도 영영 볼 수 없게 될까 봐. 그러니까 포기할 수 있게 단 한 번만이라도.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날 좋아한다고 말해준다면…….이대로 널 끌어안지 않고 견딜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
단 한 번만이라도 좋아한다고 말해준다면 그걸로 견딜 수 있었다. 버틸 수 있었다.
친구 사이에서 건네는 좋아한다는 말이 아니라 좀 더 다른 의미의 좋아한다는 말이라면, 자기가 지금 손에 쥔 것과 같다면 거짓말이라도 좋았다. 그 짧은 한마디라도 붙잡을 수 있다면 됐다.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바람결을 따라 벚꽃이 내렸다. 그 날 같았다. 유리 너머를 보는 시늉을 하며 창문에 비친 얼굴을 줄곧 보고 있었던 눈이 내리던 그 날. 천천히 잡고 있던 팔을 놓았다. 계속 잡고 있으면 문득 제 품에 안아버릴 것만 같아서. 손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한 마디, 한 마디 안쪽에서 피어난 무언가를 입에 담을 때마다 지금까지 쌓아두었던 걸 뜯어내는 것처럼 가슴 안 쪽이 죄어드는 것만 같았다. 제멋대로 헐떡이듯 맥이 뛰면, 목에 숨이 자꾸 걸렸다. 쏟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적지 못하고 삼키기만 했던 말들이 툭툭 떨어져 내렸다.
시선을 마주쳤다. 이번에는 네가 바로 웃지 않았다.
"아니, 사랑하고 있어."
너를 독점하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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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는 치였고요.......
자각하자마자 이대로는 못살겠어서 썼습니다..........
그냥 멘답 주셔도 됩니다. 진짜 멘답 주셔도 되고요 흐흑
아 나투지 귀여워 젠장쿠뽀 이제 탐라에서 당당하게 말할거야
나
투
지
귀
여
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