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견안경] 진심이 아니라고 해도

Unlight

# 에바 R3/베른 R2 미리니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_.

http://hosikira.tistory.com/entry/a 의 에바 시점.



 아침 인사를 대신하는 것마냥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가 뜨거웠다. 그저 쥐고만 있었던 책이 곤두박질 치며 바닥을 세게 쳤지만, 그 소리는 어느 틈에 까무룩 새까맣게 묻혔다.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어째서, 하고 물어도 되돌아 오는 것은 없으리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갈수록 덩달아 고운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난로에 던져진 두꺼운 장작들 사이로 새빨간 불꽃이 이리저리 날름대고 있었지만 방 안은 기묘하게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빗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착각일 수도 있었다. 오로지 가까이 다가온 호흡만이 야단스러웠다. 흠칫 놀라는 사이 눈 앞이 뒤로 밀리며 절반 꺾였다. 날이 제대로 밝지 않아 어두운 천장이 가까스로 보인다고 생각하면, 비 때문에 젖어 식어가는 체온이 제 몸 위에 겹쳐졌다. 그제서야 죽어있던 감각이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줄곧 생각에 잠겨있었기 때문에,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하는 것이 오래 걸렸는지도 모른다. 시야에 가득 찬 익숙한 푸른 빛깔만은 상대가 누구인지 당연하게 일깨워주고 있었지만. 


희미하게 겹쳐지던 기억이 단번에 날아가버렸다. 

손목을 비틀수록, 세게 붙드는 그 손에 새하얀 손톱 자국을 새길수록, 빠져나가려 할수록 갉아먹는 것마냥 붙잡는 손길이 거칠었다. 아이자크, 그만해. 이름을 불러도, 그만하라고 말해도 되돌아오는 것은 목덜미를 깨물듯 강렬하게 떨어지는 입맞춤뿐이다. 따스한 갈색의 눈이 흔들렸다.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걸 파악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니, 그럴 생각이 없는 거겠지. 무슨 생각으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확실한 것은 자신이 그의 기분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단 한 가지 뿐이었다. 화를 내고 있는지도 몰랐다. 도대체 왜.  


등 뒤에 닿는 차가운 소파의 감촉. 잠 기운이 온전히 달아날 만큼 어지러운 키스가 고르던 호흡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으면, 꺾일 것처럼 강하게 잡힌 손목의 고통이 희미해졌다. 비의 온도로 허리선을 타고 올라오는 손길. 순간 순간 내달리는 쾌감에 몸을 들썩이면 당연한 것처럼 단정하던 눈매가 천천히 젖었다. 아이자크, 하고 저절로 나오는 이름이 별 소용없이 바스러진다. 살짝 오므라든 발끝이 어쩔 줄을 모르고 소파 위를 몇 번 쓸었다. 목선을 따라 떨어지는 깨무는 듯한 입맞춤. 저도 모르게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하면, 짓누르는 것처럼 실리는 무게가 선명했다. 문득 스치듯 맞닿은 시선에 파르르 입술이 떨렸다. 일렁이는 그림자 사이로 보이는 그 표정이ㅡ.


"눈 감고 그 사람 생각이라도 하고 있어, 에바."


평소와 별다를 것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내뱉는 목소리는 지독하게 무미건조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든 것이 새하얗게 번졌다. 잠깐만. 제 귓가에서 속삭이던 목소리가 멀어지기 전에 다급하게 고개를 돌려 입을 열면, 그에 답하기라도 하듯이 셔츠가 밀려 올라갔다. 제자리를 찾지 못한 안경 때문에 반은 흐려진 시야가 불편했다. 너는 무얼 생각하고 있는 거지, 아이자크? 수수께끼의 중요한 힌트처럼 뛰쳐나온 한 단어가 심장 한 켠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손을 뒤틀어도 제 손목을 붙든 그 손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그런 게 아니야, 하고 말해야 하는데. 나는. 내가 생각했던 건. 가까스로 입을 달싹이면 변명마냥 튀어나오는 신음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 채웠다. 아이자크의 손등에 남겨진 붉은 선마냥 엉망으로 뒤엉킨 채로.

 



 

[군견안경] 진심이 아니라고 해도 

 

 



그저 떠올랐을 뿐이었다. 

누군가의 목숨을 대가로 얻어낸 생명, 그 무게에 대해서. 한 번 파고든 그 생각은 의외로 오랫동안 빙빙 맴돌았다. 에바리스트는 귀빈석의 끝에 바르게 앉은 채로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높은 연설대 위에서는 사람만 바뀌었지 똑같은 말만 늘어놓는 형식적인 추모식이 한창이었다. 군간부들이 대부분 참석한, 일종의 화합회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전장에서 죽어간 군인들을 떠올리기보다는 제 잇속들을 채우기 위해 모인거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 속에는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동료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고 안타까워할 그런 감정은 이미 오래 전에 잃어버렸다.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곁에 남은 것은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수 만 명의 죽음보다 그가 다쳤다는 이야기가 더 괴로울 정도로. 그랬다. 결국 생각이 생각을 물고서 돌아오는 지점은 항상 같았다. 저 차가운 돌 위에 그의 이름이 쓰여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물끄러미 묘비를 쳐다보았다. 미미하게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연설대 너머 보이는 수 천, 수 만개의, 아니 그 이상의 일정한 지표가 눈에 가득 들어왔다. 꺼져버린 목숨이 잠겨있는 대지. 그 뿐이었다.    


ㅡ자랑스러운 그란데레니아의 군인들이여, 그대들의 이름은 불멸입니다. 이 나라를 사랑했기에 죽음조차 두려워 하지 않고 전장에 나간 당신들께 깊은 감사와 존경을.....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벌써 몇 십분 째 이어지고 있는 지루한 연설이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리게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리 높으신 분들이라고 해도 저런 추모사를 스스로 쓰지는 않는다. 몇 명이 죽든 말든 전투의 승패만이 중요할 뿐이니까. 결국은 그럴싸하게 적당히 만들어진 대본을 읽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니 그 내용을 기억할 턱이 없기에 적당히 몇 문장을 기억해 뒀다가 기억에 남았다거나 특히 좋았다거나 하며 맞장구 치면 될 일이었다. 그나마 오늘 추모식에서 볼만한 것은 검은 리본을 두른 채, 연설대 주변에 장식 되어있는 흐드러지게 핀 국화뿐이었다. 결코 시들 일이 없을 백색의 국화가 아른아른하게 바람결을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전쟁이 지속되는 한 앞으로도 몇 번이고 반복될 행사가 아닌가.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찬 바람에 마른 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이유 없이 답답한 기분이 아까부터 마음 한 켠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바르게 정렬 되어있는 묘비로 시선만 움직였다. 제대로 보이지 않는 전쟁에서 죽어간 군인들을 기억하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그의 가족, 그의 연인, 혹은 그의 소중한 사람들뿐이다. 문득 떠올랐다. 레지먼트의 훈련생인 시절, 잠을 설쳤던 적이 있었다. 산책 삼아 걷던 길을 따라 올라가면 지금 눈 앞에 있는 광경과 닮은, 그런 곳이 있었다. 새벽이 피어나던 그 때 들었던 이야기가 자연스레 머릿속을 맴돌면, 포레스트 힐에서의 일도 덩달아 엮인 채 기억이 났다. 누군가를 대신해서 이어가는 호흡 하나 하나. 자신도 그 비슷한 무게를 알고 있다.  목숨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와 비슷한 것을 빼앗았으니까. 반복되는 추모사가 끝나고 박수 소리가 묘지를 덮었을 때가 되어서야 에바리스트는 생각을 끊었다. 

 

그제서야 이 불편한 감각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잠에서 깨버렸다. 어쩌면 너무 피곤해서 깊이 잠들지 못했던 것 일수도 있었다. 당장 눈이 감길 것 같으면서도 막상 침대에 누우면 잠이 들지 않는다. 눈이야 감고 있지만 그렇게 몇 십 분은 허투루 흘려 보내야 겨우 잠드는 게 벌써 며칠 째였다. 그렇다고 눈이 감길 때까지 책상 머리에 앉아 있을 수는 없는 것이 호위랍시고 새벽까지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선 채 있는 그 녀석 때문이었다. 자신보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주제에 하루 종일 멀쩡하게 다니는 걸 보면 신기하긴 했다. 원래 잠이 없다고는 하지만. 고개를 들면 잠깐 현기증이 일었다. 딱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을뿐더러 신경 쓰이는 일도 없는데. 쓸데없이 예민해서인지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는 소리를 알아채자마자 잠에서 깨버린 에바리스트는 무의식적으로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새벽이었다. 제대로 잠든 건 세 시간쯤 되려나. 베개에 얼굴을 파묻는 것 대신 몸을 일으켰다. 아이자크는 이런 새벽부터 밖을 둘러볼 생각인 듯했다. 그 짧은 틈에 불이라도 올려놓은 것인지 나무 장작이 타닥타닥 타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선명하게 들렸다.    


습관적으로 읽다 만 책을 들고 소파에 비스듬하게 기대듯이 앉았다. 고개를 조금 돌리면 빗물로 흐려진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유리에 그이는 물줄기는 보일 듯 말듯 가늘었지만, 옅게 들리는 빗소리는 제법 을씨년스러웠다. 평온한 새벽이라고 하기엔 어두운 분위기다. 책을 읽을까 했지만, 쭉 나열된 글자들을 보고 있으려니 어쩐지 머리가 아파서 잠깐 눈을 감았다. 그러다 눈을 뜨면,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보이는 감각이 이런 거구나, 하고. 그 때는 오로지 그 곳에서 멀리 달아나야 한다는 생각으로만 가득 차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 쪽 눈을 잃는다는 것. 어쩌면 하루하루 동료들이 죽어나가는 레지먼트에 익숙해져서 단순히 살아있다는 것에 안도했을 수도 있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일을 곱씹으려니 공연히 헛웃음이 났다. 


"에바?"

"...미안, 못 들었어."


때맞춰 들리는 제 이름에 소파에 기대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모르게 아이자크가 바로 가까이에 있었다. 외투까지 바르게 걸려있는 것을 보면 방금 막 들어온 건 아닌 모양이었다. 순순히 못 들었다고 대답하면, 어깨를 으쓱하며 늘 그렇듯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별 것 아니야. 네가 이렇게 일찍 일어난 게 신기해서. 이불 속에서 5분만을 외치고 있을 것 같았거든."

"쓸데없는 농담이군."


확실히 평소라면 늘어지게 자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왕 이렇게 일찍 일어났으니 효율적으로 일이라도 미리 해놓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아침 식사를 멀쩡히 일어나서 그렇게 빨리 하는 것은 오랜만일 테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그의 오른쪽 눈 위에 놓인 안대를 마주하면 흐릿한 기억이 떠올랐다. 


ㅡ불편하지는 않아? 

ㅡ글쎄, 잘 모르겠는데. 


푸른 눈이 있었던 자리를 흑색의 안대가 대신 채웠다. 어색한지 끈을 자꾸 만지작거리는 손을 강제로 아래로 내리고는 끈에 눌린 머리카락을 빼내 주었다. 마치 자신이 처음 안경을 썼었던 어렸을 때마냥 안대를 쓰고서 이리저리 기웃거리던 아이자크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안경을 고쳐 쓰면서 에바리스트가 말을 이었다. 끈이 너무 당겨서 머리가 아프다든가 어지럽다거나, 그런 걸 묻고 있는 거야. 아.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아이자크가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이렇게 하면 네가 안 보여서 불편해. 헛소리 하지마. 장난스럽게 올라가는 입 꼬리는 어린 아이마냥 밝아서 아무렇지 않게 넘겨버렸는지도 몰랐다. 


그 때 미안하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이제서야 물씬 덮쳐오는 죄책감이 마음 한 켠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제 손목을 붙잡힌 건.





 금세 가쁜 숨이 튀어나왔다. 이미 단추를 잡아뜯듯 풀어, 반쯤 어깨 아래로 끌어내린 셔츠는 잔뜩 구겨져 있었다. 피부 위에 올려진 손가락은 천천히 자신을 농락한다. 부드럽게 쓰다듬고 입술로 가볍게 물어가며 위에서부터 아래로 차근차근 혀를 미끄러뜨렸다. 매끈하게 뻗은 허리선을 따라 손가락을 떨어뜨려 살짝 예민해진 곳까지 건드렸다. 억지로 참는 듯한 신음소리가 새는 입술을 억지로 벌려 소리를 내게 한 다음 타액으로 젖은 손가락으로 입술을 쓸어내는 손길. 열꽃이 잔뜩 피어서 멍한 그 순간에도 에바리스트는 방금 전 들었던 말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가까스로 내린 결론은 어째서 그 분의 이름이 나와야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것뿐이었지만. 하지만 아이자크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굳이 고쳐줄 생각은 없었다. 질투라고 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질 나쁜 독점욕은 자신에게도 있었으니까.  


간신히 풀려난 손을 뻗어 끌어안듯 목에 감았다. 그 끝에 휘감기는 체온은 지독하게 익숙했다. 감정을 부딪치는 것마냥 열기에 물든 손 끝에 힘이 실렸다. 어깨에 파묻듯 얼굴을 숙이고는 달뜬 숨을 억누른 채 겨우 이름 하나를 입에 담았다. 


"     "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몰라도, 나는 지금 네 곁에 있어ㅡ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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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부른 이름이 누구 것인지는 취향따라 골라주시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