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하는 짓이야, 에바!"
어느 때든, 돌발상황이라는 것은 존재했다.
기어이 힘이 빠진 손에서 빠져 나온 검이 바닥에 부딪쳤다. 새벽 안개가 고요히 가라앉은 숲 속은 작은 소리 하나도 크게 파문을 그리며 둥글게 주변으로 번져간다. 높게 치솟는 익숙한 목소리에 에바리스트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웅웅거리며 울리는 감각에 머리 속이 어지러웠다. 현기증, 그래, 현기증이 날 정도로. 축축한 습기로 그득한 이 곳에서 숨을 내쉴수록 차가운 무언가가 폐 속에 달라붙는 듯한, 그런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 세우고 근처에 보이는 굵은 나무를 짚었다. 미끄러지는 백색의 실크 위로 더러운 이끼 자국이 짙게 남았다. 붉게 물든 장갑을 천천히 벗었다. 핏자국이 가시지 않은 손끝은 아직 따뜻하다. 생(生)의 감각이 소름 끼치도록 선명했다. 어차피 이 세계에서 자신은 죽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좀 더 늘어나는 법이다. 무모한 행동도 필요하면 해야 했다. 에바리스트는 제 옆에서 가만히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소녀를 보았다. 망가지진 않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조심스럽게 옷깃을 붙잡는다. 그 자그마한 표현이 소녀가 내보이는 걱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기괴한 울부짖음이 끝나자마자 커다란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에 맞춰, 들고 있던 검을 내던지고 이쪽으로 누군가가 달려드는 기척이 일었다. 흐트러진 호흡을 고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차하면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군, 아이자크.
"착각하지마."
너 때문이 아니야. 목소리는 평상시와 다를 것이 없었다. 침착하고 냉정한 그대로. 딱딱한 군화 아래로 핏물이 고여 들었다. 맨손으로 피가 튀어 오른 안경을 고쳐 썼다. 최악이군. 멀쩡한 것이 없었다.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시야에 나무를 지지대 삼아 기대서 섰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화사한 금발은 괴물의 체액으로 한층 어두워져 있었다. 괜찮아? 희미한 떨림이 스민 목소리에 에바리스트는 작게 혀를 찼다. 새파란 시선 위로 귀와 꼬리를 힘없이 늘어뜨린 개 한 마리가 겹쳐보였다. 끈적하고 비릿한 핏빛의 잔해 위를 밟고 온 아이자크를 쳐다보며 에바리스트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자크는 그제서야 에바리스트 옆에서 붉어진 제복 한 자락을 뜯어질 것처럼 꾹 붙잡고 있는 소녀를 눈에 담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차린 듯 했다. 미안해, 하고 짧은 사과가 솔직하게 따라 붙었다. 이 상황에서 뭐라고 대답하는 것이 좋을지 에바리스트는 딱히 적절한 말을 찾지 못했다. 어지러운 시계(示界)를 다잡으며 깊게 숨을 내쉬었을 뿐이었다.
조금 전에 있었던 '괴물'과의 전투로 치명상을 입은 것은 늘 선봉으로 나서는 아이자크 쪽이 아닌 에바리스트였다. 상대하는 것들이 괴물이라고는 해도 멍청하지는 않다. 기습이라는 것을 할 줄도 알고, 누구를 먼저 공격해야 할지도 알았다. 부상자가 있으면 부상자부터, 약한 사람이 있다면 약한 사람부터. 지시자는 보통 선두와 함께 했다. 예측하지 못한 기습에 당황할 틈도 없이, 무작정 뛰쳐나간 고삐 풀린 개 한 마리가 순식간에 땅 위에 피를 뿌려댔다. 붙잡을 틈 없이 따라나선 지시자가 아이자크의 바로 뒤에 따라 붙었을 때, 수풀 속에서 튀어나온 늑대과의 괴물 하나가 날카로운 손톱을 휘둘러 그대로 내리그었다. 군견이라고는 해도 상황을 파악하고 움직일 틈은 있어야했다. 이미 한껏 전투에 신이 난 그가 앞뒤 가릴 리가 없었다. 방어보다는 공격에 치중된 움직임은, 치명상을 맞는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상처가 늘면 늘수록 극한까지 상대에게 검을 찔러 넣는다. 그게 아이자크였다. 그랬기에 그 사이에 끼어든 것이 에바리스트였다. 성녀의 딸이 부서지는 것은 곤란하다. 가시나무를 펼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소녀를 끌어당겨 품에 감싸는 것이 전부. 거리를 벌리지 못한 사이, 새까만 불꽃이 눈 앞에서 튀었다. 뺨을 스치고 거세게 지나가는 바람. 무언가가 찢어지는 소리. 단정히 쓰고 있던 군모가 바닥에 떨어짐과 동시에 반으로 찢어진 코트가 천천히 질척한 바닥 위로 가라앉았다.
아이자크는 바닥에 떨어진 에바리스트의 군모를 주워서 손으로 툭툭 털었다. 아무것도 안 묻었네. 금세 본래 페이스를 되찾은 그가 살금 에바리스트의 머리 위에 군모를 올렸다. 나름대로 분위기를 바꾸어보려는 노력임을 에바리스트가 모르지는 않았다. 코트는 그냥 입진 못하겠다. 그치, 에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하게 말을 걸기 시작하는 아이자크의 금빛 머리를 엉망으로 헤집어 놓으며 에바리스트는 내려 뜬 시선으로 입을 열었다.
"주변을 좀 살피면서 물어뜯어."
진심 어린 충고였다.
[군견안경] 손을 잡다
For. 해피데이
어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적인 늦은 밤. 어둠이 깊고 낮게 깔리는 시간에는 모든 것이 짙어지곤 했다.
별빛이 쏟아지는 하늘. 은은하게 떠있던 달의 반짝임, 안개 속에 번지는 검푸른 호수의 파문 그리고 그 곁에서 하늘거리는 풀빛. 어두워질수록 켜둔 주홍색 등이 밝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산뜻한 음악의 한 장을 연주하듯 울리는 풀벌레 소리도 그 정도를 더해가는 시간. 대기조로 정해진 에바리스트와 아이자크는 다른 이와 함께 밤 탐색을 나가는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정은 이미 훨씬 전에 지나쳐있었다. 평범한 아가씨라면 이미 잠에 빠져도 모자랄 시간이지만, 평범한 육체를 가지지 않은 소녀는 언제나 활발하게 움직였다. 에바리스트는 문득 시선을 들었다. 끝이 눈동자에 비치지 않는 숲 속에는 간간히 몇 개의 흰 불빛만이 비쳤다. 괴물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걸 알아보기 위해 나가는 것일까. 잠깐 생각에 빠져있으면 소녀가 에바리스트의 손을 잡아 끌었다. 지시자? 하고 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얼떨결에 끌려나가는 것마냥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난 에바리스트는 소녀가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약간 높이가 있다 싶은 바위 위. 그 곳에는 아까부터 망을 본다는 핑계로 아이자크가 차지하고 있었다.
제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소녀의 손은 차갑다. 인형이라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겉보기에는 살아있는 것 같지만 막상 닿으면 그게 아님을 깨닫는다. 그럼에도 하는 행동은 인간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 미묘한 차이가 처음에는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 지, 애매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가 평범한 소녀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은 알아차렸지만. 바위 앞에서 멈춰선 소녀가 붉은 유리알을 들어 에바리스트를 한 번, 그리고 아이자크를 한 번 지그시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야, 지시자? 하고 이쪽을 힐끔거린 아이자크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냈다. 소녀는 단호한 표정으로 팔을 쭉 뻗어, 자그마한 손으로 아이자크의 손도 붙잡았다. 아이자크가 의도를 모르겠다는 얼굴로 소녀를 쳐다보고 있으면, 생글생글 웃으면서 따로따로 붙잡은 두 사람을 손을 끌어당겨 겹쳐놓는다. 어색하게 엇갈리는 손가락 끝이 시렸다. 그렇군. 에바리스트는 비어있는 손으로 안경을 고쳐 썼다. 아이자크의 손을 잡을 때 설마, 하긴 했지만 정말 이런 걸 시킬 줄은 몰랐다. 어설프게 겹쳐있는 두 사람의 손을 지그시 쳐다보며 소녀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불만스럽다는 의사표현을 저렇게 또렷하게 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지.
어쩔 수 없었다. 딱히 달리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에바리스트는 먼저 아이자크의 손을 잡았다. 에바? 하고 놀라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천천히 소녀에게 확인한다. 이제 가보는 것이 좋겠군,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제서야 환하게 웃음 지은 소녀는 그대로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달려나갔다. 따뜻해 보이는 보송보송한 붉은 원피스 차림으로. 어둑어둑한 어둠이 내려앉은 숲의 입구에서 소녀를 기다리던 실루엣들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에바리스트는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 때였다. 슬금 손 안에 쥐고 있는 온기가 빠져나가려고 한 것은. 입을 여는 것보다 시선을 얽는 편이 더 빨랐다.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으로 아이자크가 땅이 꺼질 것처럼 한숨을 쉬었다.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마냥 불편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뻔히 보여 우스울 지경이었다.
"....계속 잡고 있을 필요는 없잖아."
"놓아야 하나?"
"당연하지."
"싫은데."
그렇게 태연하게 되물으면, 아이자크는 할 말을 잃은 듯 멍하니 이 쪽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살짝 잡은 손에 힘들 주면, 차분히 가라앉은 밤 공기마냥 침착한 에바리스트와는 달리 당황한 듯 몇 번 눈을 깜빡인 아이자크가 결국 고개를 틀었다. 생각해보면 이제껏 이렇게 나란히 손을 잡고 있었던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때, 포레스트 힐에서 아이자크의 손을 잡고 도망치듯 내달렸던 기억은 아직 선명했지만, 그 이외에 특별히 손을 잡을 일이 없었다. 아니, 그 이후에 제 앞에서 먼저 길을 열었던 것은 아이자크였다. 이계의 생물에게 둘러싸이든, 적군에게 둘러싸이든. 어쩌면 앞 뒤 안 가리고 무조건 적에게 달려드는 습관은 자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이자크는 스스로 피 흘리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아 했지만, 자신이 다치는 것에 관해서는 예민하게 굴었다. '이 곳'에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었다. 어중간하게 되찾은 생명은 지시자라는 명목으로 함께 다니는 소녀가 있는 한 절대 꺼지지 않았으니까. 칼에 베이고 총탄에 꿰 뚫려도 소녀가 있으면 오래 지나지 않아 멀쩡해진다. 그것이 에바리스트가 자신보다 소녀를 중시하는 이유였다. 하지만 아이자크는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는 듯했다. 평소와 달리 가라앉은 분위기가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그 것은, 에바리스트가 어떻게 건드릴 수 없는 부분이었다. 네 몸을 먼저 챙기라든가, 자신보다 지시자를 우선 순위에 두라고 하는 것들은.
"아이자크."
이름을 불러도 반응이 없었다. 이렇게 조용한 시간에 못 들었을 리는 없으니, 못 들은 척이다. 아이자크. 한 번 더 불러도 대답은 여전히 없었다. 작게 한숨을 쉬고는 슬쩍 손에 힘을 뺀다. 따뜻한 온기가 반쯤 사라졌다고 느낄 때쯤 그가 도로 제 손을 꼭 잡는다.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라 에바리스트는 애써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럼에도 들썩이는 어깨를 완전히 없는 것처럼 숨길 수는 없었다. 다행히 아이자크는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아서 알아차리진 못한 것 같았다. 밤이슬이 하나하나 어깨 위에 내려 쌓였다. 잡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한 게 누구였지? 농담 삼아 말을 던지면, 다시 자신에게로 되돌아온 시선이 할 말을 찾는 듯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괜찮아."
여기서는 절대 죽지 않아. 그러니까 네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다시 한번 확인하듯이 에바리스트는 그렇게 아이자크의 손을 꼭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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