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리스트&아이자크]
발을 뻗어 코 앞에서 고꾸라지는 늑대도 사람도 아닌 것을 힘껏 걷어찼다.
길 위에 너저분하게 찍힌 초록색의 핏빛은 아이들이 내던져 놓은 퍼즐 조각마냥 엉망진창으로 튀어 있었다. 그 위로 드리우는 주홍 색 노을은 생각보다 따스한 빛깔이었다. 하나, 둘, 셋. 풀풀 날리는 새파란 털을 털어내며 시체의 개수를 헤아린다. 그리고 넷. 나무 밑동에 죽은 몸이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 땅이 울릴 만큼 무거운 소리는 나뭇잎을 뒤흔드는 총성을 잡아먹을 만큼 컸다. 아주 징글징글한 놈들이군. 기괴한 괴물의 숨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미 정리는 끝났으리라. 한바탕 전투가 끝난 후 검 끝에 묻은 녹색의 핏방울을 털어내며 아이자크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바로 근처에 등 돌린 흑색의 제국군 코트가 눈에 들어왔다. 기척을 알아차리고 시선을 넘기는 에바리스트는 언제 검을 들기라도 했냐는 듯 여전히 단정한 차림새였다.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는 소름 돋는 균사체가 머리 위에 돋아난 청회색의 토끼가 달려오던 자세 그대로 뻗어 있었다. 아이자크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던 괜찮냐는 말을 도로 집어 넣었다. 걱정한 내가 바보지. 깔끔하게 뚫린 정수리의 구멍이 누구 솜씨인지는 뻔하고 뻔했다.
흐트러진 안경을 밀어 올리며 에바리스트는 시선으로 주변을 훑었다. 근처에 있는 놈들은 다 죽은 것 같아. 마치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아이자크가 한 발자국 먼저 입을 열었다.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것은 익숙하다. 제 생각을 읽은 것마냥 아이자크가 먼저 대답하는 그런 상황은. 그렇군, 습격치고는 조촐한데. 자잘한 토끼까지 합해봐야 여섯이다. 인원이 적은 대기조를 급습한다는 발상은 괴물들이 하기엔 꽤 괜찮은 생각이었지만 상대의 전력을 과소 판단하면 결과는 이렇듯 비참했다.
에바. 몸이 덜 풀린 모양인지 있는 힘껏 기지개를 켠 아이자크가 터벅터벅 걸어 근처에 있는 나무에 팔짱을 낀 채로 삐딱하게 기대섰다. 지시자는 아직이지? 그 말에 찻빛 시선을 고정시켰다. 젠장, 어콜라이트 놈들은 뭐하는거야. 이런 음침한 숲은 1분 1초라도 빨리 나가고 싶다고. 적당히 하고 돌아와야 하는 거 아냐? 벌써 해가 지고 있는데. 얌전히 기다려, 아이자크. 제 대답은 처음부터 들을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푸른 눈동자 위, 구겨진 눈매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 번 시작한 그의 불만 사항은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은 채,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자신이 갔다면 벌써 탐색은 끝냈을 거라는 둥 아가씨 아가씨 하면서 어콜라이트들이 지시자를 떠받들지만 사실 지시자가 그렇게 연약한 소녀는 아니라는 둥. 에바리스트는 그런 맹우의 푸념에 가볍게 한 번 웃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잔뜩 쌓여있던 짜증을 쏟아놓는 방법이 의외로 효과가 있었는지 아이자크는 갑자기 조용해졌다. 사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는 쪽이 맞을지도 몰랐다. 둘만 있을 때 그는 분위기를 띄우는 것 마냥 혼자서 말하고는 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걸 잠자코 듣고 있는 것에 익숙했다. 글쎄, 이 곳에서 지낸 시간이 그리 길지 않으니 '익숙하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렇게 밖에는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계절 구분 없이 이어지는 날들.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괴물의 시체에서 올라오는 역한 악취가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질 즈음 자신과 아이자크는 박쥐를 시작으로 다양한 괴물들을 능숙하게 베어 넘기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예전의 기억이 툭툭 튀어 올랐다.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일이라거나 혹은 제국에서 전장에 나갔던 일들, 그 밖에 다양한 단편적인 기억. 확실해진 것은 에바리스트와 아이자크, 이 두 사람의 관계가 '맹우'라는 단어를 가져다 써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절친했다는 것뿐이었지만. 그러니까 예전에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을지도 몰랐다. 벌써 익숙하다고 느끼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종종 들고는 했다. 기억을 되찾을 때마다 예전에 공유했던 시간까지도 되돌려 받는 것만 같았으니까 말이다.
"아."
뚝 끊긴 화제거리를 이어 붙이듯 아이자크가 뭔가 떠오른 것처럼 얼빠진 소리를 냈다. 덕분에 음산한 숲의 우울한 분위기도 저녁 빛으로 깨졌다. 노을 색으로 물든 것처럼 반짝이는 금발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아이자크는 마침 생각났다는 듯 불쑥 말을 던졌다. 분위기를 띄우려는 목적인지 단순히 심심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에바. 다음은 네 차례라고 하던데."
차례? 그렇게 물으면 흰 장갑을 낀 손가락 끝이 머리 쪽을 가리켰다. 아이자크가 말하는 '차례'가 기억을 되찾는 순번이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런가. 에바리스트는 살짝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지시자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에는 자신들의 기억을 되돌려주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처음에 들었던 것처럼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되면, 원래 있었던 곳에 부활할 수 있다고 했었다. 도대체 어떤 원리를 통해서 그렇게 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피폐한 대지를 계속 걸어나갈수록 잃었던 저쪽의 기억이 퍼즐을 짜맞추듯 하나하나 채워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름. 생일. 좋아했던 것, 싫어했던 것. 처음에 아이자크의 이름조차 떠올리지 못했던 걸 생각하면 신기한 일이었다. 지금은 피망을 싫어한다는 시답지 않은 것까지 알고 있으니까.
기억을 되찾는다. 새삼스럽게 기쁘거나 들뜨는 일은 아니었다. 단지 해야 할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을 뿐이었다. 에바리스트는 화제를 툭 던져놓고는 말이 없는 아이자크를 응시하고 있었다. 지시자가 오기까지 딱히 할 일이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읽을 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손에 잡히는 것은 오로지 검뿐이었다. 자신이 두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이 곳은 기억 속과는 많이 달랐다. 빛이 없는 세계. 아무 것도 없는 척박한 세계. 할 수 있는 것은 지시자의 인도대로 걸어나가는 것. 그 것뿐이다. 그녀가 없는 지금 제국 기사와 군견은 무용지물이었다. 그저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약속한 장소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그 때였다. 메마른 흑색의 땅을 규칙적인 박자 없이 내키는 대로 두드리던 군화 끝이 뚝 멈추었다. 몇 번 폈다 쥐었다 한 손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는다. 어떻게 말해야 할 지를 고민하는 깊은 푸른색 눈동자가 이내 흐트러졌다. 시선에는 망설임이 금방이라도 미끄러져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무섭지 않아?"
답지 않은 질문이었다. 아이자크는 줄곧 가지고 있었던 걱정을 꺼내놓을 작정이었다. 차마 말하지 못했던 아슬아슬한 직감. 빙 돌려 말하는 것은 성격과도 맞지 않고, 애초에 그런 짓을 해 봤자 에바리스트에게 통할 리가 없다는 것은 진즉 알고 있었다. 마치 옛 추억이라도 꺼내듯 지극히 자연스러운 말투. 무슨 말을 하는지 주의 깊게 듣고 있지 않으면 평소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첫 마디를 꺼내기가 그렇게 어려웠는데, 의외로 한 번 입이 떨어지면 말을 잇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쩌면 괜한 말을 하는 걸지도 몰랐다. 에바리스트는 그저 듣고만 있었다.
"이렇게 계속 기억을 찾다 보면 지금 같이 있는 다른 사람이랑 너랑 연관이 있었을 수도 있고. 음, 그게 꼭 좋은 일이었다고는 할 수 없잖아."
"왜. 나를 죽인 사람이라도 있을 것 같아서?"
조심스러운 물음에 날아드는 대답은 직설적이었다. 되돌아오는 기억은 제멋대로였다. 어렸을 때의 기억에 앞서 청년 시절의 모습을 먼저 떠올리는 경우도 있었다. 단지 공통점이 있다면 어느 누구도 죽을 당시의 기억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처음에는 마구잡이로 모은 인원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나 둘 지시자의 손을 잡아 주는 이들이 늘어나고 기억의 빈틈이 채워질수록 묘하게 이어져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그 속에서 가장 특별한 관계에 놓여있는 것이 아이자크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생각했던 대답과는 저 멀리 있었던 모양인지 아이자크는 순간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벙 찐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작게 한숨을 쉬며 에바리스트는 시큰둥하게 덧붙였다. '내일 날씨는 비가 올 것 같다'라고 하는 담담한 어조와 다를 것이 없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충격에는 충격이 잘 먹히겠지.
물론ㅡ.
"너일 수도 있겠지."
"에바!"
이번에는 대답이 재빨랐다. 못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길길이 날뛰기 직전인 아이자크가 말을 뚝 끊은 것도 모자라 들쭉날쭉하게 말을 이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너 말이야, 아니다. 차라리 내가 죽었으면 죽었지, 미쳤냐, 내가 어떻게 너를 죽이겠어. 섭섭하게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앞뒤 가리지도 않고 생각나는 대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이야기들을 에바리스트는 하나하나 제대로 주워 담고 있었다. 알아듣는 것에 문제는 없었다. 게다가 당연히 이런 반응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놀랄 일도 아니었다. 한결같다. 사소한 사실에 한편으로는 안도하는 자신이 있었다. 예전과 똑같이 믿을 수 있다. 홀로 떨어진 세상에서 편안하게 기댈 수 있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그가 알고 있을까. 언제 가라앉아 있었냐는 듯이 잔뜩 눈매를 치켜 올린 채 절대로 자신을 죽이는 일은 없었을 거라고 열변하는 아이자크를 보며 에바리스트는 애써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 생각을 안 해봤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기억이 비어있다는 것은 언제나 이런 쓸데없는 상상을 하게 만들고는 했다. 기본적으로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움직이는 습관이라도 있었던 것인지 되돌아오는 시간을 붙잡으면서 가장 먼저 했던 것이 자신이 어떻게, 왜 죽어야 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목숨을 걸고 뜻을 함께한 사이라도 틀어질 수는 있다. 그렇다면 '배신'의 존재를 배제할 수는 없었다. 물론 이 가정은 이미 옛날 옛적에 지워버린 지 오래였지만.
"아니면 내가 널 죽였을 수도 있고."
그렇게 내뱉는 어조는 의외로 담담했다. 이제는 거의 다 져버린 노을 바람이 간간히 군모에 짓눌린 검은 머리카락을 흩뜨려놓았다. 벌써 차게 식어가는 공기를 들이마시면 조금 전과는 완전 다른 반응이 되돌아왔다. 아이자크가 자신을 배신하는 일은 없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반대의 상황을 가정했을 때 자신이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에는 솔직히 말해서 자신이 없었다.
"음, 그렇게 미움 받을 짓을 했을 것 같진 않은데 말이야."
아이자크는 도로 팔짱을 끼면서 대답했다. 네가 사랑하는 여자라도 뺏었으려나? 이래서야 김이 빠진다. 지나치게 가벼이 넘겨버리니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이쪽이 오히려 바보가 되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지금은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기억의 공백을 다 메우는 것은 먼 훗날이 될 테니까. 앞날의 걱정보다 당장 닥칠 일에 신경을 쓰는 게 좋을지도 몰랐다. 넌 눈이 높았을 것 같으니까 엄청난 미인이었을 것 같은데. 생각나면 꼭 말해줘야 해, 에바. 농담마냥 던지는 말에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짓는 것 말고는 딱히 해줄 게 없었다.
"그런 것보다도 네가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는지나 걱정하는 게 어때? 아이자크."
함께 있었던 만큼 그 순간의 기억을 공유한다. 좋든 나쁘든. 태연히 되돌아오는 말들은 편안했다. 머리 아프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뭐, 아무려면 어떤가. 설령 제 목숨을 앗아간 사람이 주변에 있다고 해도 각자의 사정은 있기 마련일 테다. 그 반대의 경우도 물론, 있을 거고.
"설마 내가 누구처럼 술 먹고 옷 벗고 그랬겠어?"
"글쎄. 어쩌면 보기 좋게 여자한테 차이고 와서 눈물 콧물 빼면서 울었을지도 모르지."
"그 정도는 괜찮은데, 에바? 실연당했다고 건물에 불을 지른다거나 그런 거면 몰라도. 아님 술 먹고 상관 얼굴에 물건을 던졌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술 먹고 하루 종일 토했다든가ㅡ."
장난스러운 웃음기를 두른 친숙한 얼굴이 어깨를 으쓱 였다. 그 나름대로의 망측한 짓을 늘어놓는 것을 조용히 듣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문득 몸을 기울여 어둑어둑해진 숲 속을 쳐다보던 아이자크가 아득한 그 너머로 손을 흔들었다. 희미하게 들리는 남자들의 목소리는 어콜라이트의 것이 분명했다. 지시자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잠깐 물끄러미 그 모습을 쳐다본 에바리스트는 가볍게 입 꼬리를 당겼다. 아이자크는 하나뿐인 맹우였다. 그래서 어쩌면 더 서슴없이 굴 수 있는지도 몰랐다. 소녀가 전해주는 옛 기억이 마냥 행복할 리는 없었다. 설령 끔찍할지라도, 그래도.
"어, 돌아왔나 본데?"
"그렇군."
"마중이라도 갈까?"
"쓸데없이 날뛰지마."
정말 오래 비워둔 집에 주인이 찾아온 것마냥 꼬리 치며 뛰어나갈 기세의 아이자크를 보며 에바리스트가 목 뒤쪽의 옷깃을 잡았다 놓는 것으로 제동을 걸었다. 에바, 너 말이야. 휙 뒤돌아 서는 아이자크의 머리를 능숙하게 쓰다듬으며 슬쩍 웃었다. 머리 위에 올린 손을 치워내며 아이자크는 툴툴거렸다. 됐다. 내가 말을 말지. 그제서야 한결 기분이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그래도 괜찮아. 설령 그렇다고 해도 모든 기억을 되찾아서 멈추어 있는 인생의 페이지를 다시 넘길 수만 있다면. 그 미련을 떨쳐낼 수가 있다면. 너와 함께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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